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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적혈구가 핵을 버린 이유: 핵 없는 세포의 진화와 대가
    생리활성 및 영양학 2025. 7. 24. 22:56

    적혈구가 핵을 버린 이유: 핵 없는 세포의 진화와 대가
    적혈구가 핵을 버린 이유: 핵 없는 세포의 진화와 대가



    사람의 혈액은 끊임없이 온몸을 순환하며 산소를 공급하고 이산화탄소를 제거하는 일을 반복한다.
    이 과정의 주역은 바로 적혈구(red blood cell)이다.

    그런데 적혈구는 다른 세포와는 결정적인 차이를 가진다. 바로 핵이 없다는 점이다. 인체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세포는 유전 정보를 담은 핵을 중심으로 기능을 수행하지만 성숙한 적혈구는 핵 없이 존재하며 이로 인해 분열도 하지 못하고 짧은 수명을 가진다.

    도대체 왜 진화는 적혈구에서 핵을 제거한 것일까? 핵이 사라지면 어떤 이점이 있고 그로 인해 어떤 생물학적 대가를 치르게 되었을까?

    이 글에서는 적혈구가 핵을 버린 진화적 이유부터 그 생리학적 의미,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구조적·기능적 제약까지 다각도로 알아보았다.



    1. 적혈구의 기본 구조와 기능


    적혈구는 혈액의 약 40~45%를 차지하며 헤모글로빈(hemoglobin)이라는 단백질을 이용해 산소를 운반한다. 이 세포는 핵뿐 아니라 미토콘드리아, 리보솜 등의 세포소기관도 갖고 있지 않다.

    즉, 단백질 합성, ATP 생성, 세포분열 등 대부분의 대사 활동이 불가능한 구조다. 이처럼 구조가 간단함에도 불구하고 적혈구는 기능적으로 매우 효율적이며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

    • 중심이 들어간 이중오목 구조 (biconcave disk): 표면적을 극대화해 산소와의 접촉 면적을 증가시킨다.
    • 높은 유연성: 지름이 6~8μm에 불과하지만 모세혈관(3μm 이하)을 통과할 수 있을 만큼 변형성이 뛰어나다.
    • 수명: 평균 120일 동안 순환한 뒤 비장과 간에서 제거된다.

    이 모든 특성은 핵의 제거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2. 적혈구는 왜 핵을 버렸을까?


    2-1. 산소 운반 능력 극대화

    핵은 세포 내에서 가장 많은 공간을 차지하는 구조다. 하지만 적혈구가 핵을 제거하면 그 공간에 더 많은 헤모글로빈을 채워 넣을 수 있다. 이로 인해 산소 운반 능력이 극대화되며, 조직 대사가 활발한 포유류의 요구에 부응하게 된다.

    예를 들어, 인간의 적혈구는 전체 질량의 약 97% 이상을 헤모글로빈으로 채운다. 이는 세포의 거의 모든 기능을 산소 운반에 집중시켰다는 의미다.

    2-2. 세포 유연성 향상

    핵을 포함한 세포는 구조적으로 단단하고, 쉽게 변형되기 어렵다.

    반면 핵이 없는 적혈구는 내부가 말랑말랑한 젤 상태로 유지되어 모세혈관 같은 극도로 좁은 혈관도 무리 없이 통과할 수 있다.

    이 유연성은 혈액의 점도를 낮추고, 순환 효율성을 높이며, 조직 전반에 산소를 골고루 전달할 수 있게 만든다.


    2-3. 면역 반응 회피

    핵이 없는 적혈구는 MHC 항원이 없다. 이는 적혈구가 이식 등에서 면역계의 인식을 피할 수 있는 중요한 생리학적 근거가 된다.

    실제로 적혈구는 혈액형 항원(A, B, Rh 등)을 제외하면 면역계가 쉽게 인식할 만한 내부 단백질을 거의 노출하지 않기 때문에 타인 간 수혈이 상대적으로 용이한 셈이다.







    3. 적혈구가 핵을 버리면서 치른 대가


    핵의 제거는 분명한 장점이 있지만 동시에 구조적·기능적 손실도 초래했다.

    3-1. 세포분열 불가

    핵이 없기 때문에 적혈구는 스스로 복제하거나 재생산할 수 없다. 이로 인해 골수 내 조혈 줄기세포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적혈구를 생산해야 한다.

    이 과정은 에리트로포이에틴(EPO)이라는 호르몬의 지배를 받으며, 산소 농도가 낮아지면 생성량이 증가한다.

    이로 인해 출혈, 빈혈, 고산 환경 등에서 적혈구 생산 속도는 일시적으로 증가할 수 있다.


    3-2. 단백질 합성 불가

    핵이 없으면 RNA 합성과 단백질 합성이 모두 불가능하다. 따라서 손상된 단백질을 수리하거나 대체할 수 없으며 세포가 손상되면 그 상태로 기능을 잃는다.
    이런 이유로 적혈구는 수명이 끝나면 비장에서 분해되고 새로운 세포로 교체된다.


    3-3. 세포 내 대사 능력 제한

    핵뿐 아니라 미토콘드리아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산화적 인산화에 의한 ATP 생성이 불가능하다. 적혈구는 해당작용(glycolysis)만으로 ATP를 생성하며 이 또한 효율이 낮아 에너지 여유가 거의 없다.

    그 결과, 운반 기능 외의 역할은 거의 하지 못하며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에너지로만 활동한다.







    4. 다른 동물의 적혈구는 핵이 있을까?


    모든 동물이 핵 없는 적혈구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조류, 파충류, 어류, 양서류의 적혈구는 핵이 존재한다. 이들은 체온이 낮고 대사율이 비교적 낮기 때문에 핵을 유지한 채로도 산소 운반이 충분하다.

    하지만 포유류는 높은 대사율과 활동성 때문에 핵 제거를 통한 산소 운반 능력 극대화가 필요한 것이다.

    즉, 적혈구의 무핵화는 진화적으로 포유류의 고대사 환경에 적응한 특화된 진화 전략이다.







    5. 의학적 관점에서 본 적혈구의 무핵 구조


    핵이 없는 적혈구 구조는 의학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적혈구는 혈액 질환이나 감염, 염증, 조직 손상 등에서 조기 진단의 바이오마커로 사용된다.

    또한 다음과 같은 점에서 임상적 고려가 필요하다.
    • 빈혈(anemia): 조혈 속도에 비해 손실 속도가 빠를 경우 발생
    • 용혈(hemolysis): 손상된 적혈구가 기능을 하지 못하고 파괴되는 현상
    • 부적절한 재생: 조혈 기능이 저하되면 핵을 갖춘 미성숙 적혈구(망상적혈구)가 증가함

    핵이 없는 덕분에 혈액 도말 검사나 망상적혈구 지표 등으로 조혈 상태를 확인할 수 있고 이는 수많은 질병의 진단에 응용되고 있다.








    6. 진화의 절묘한 트레이드오프


    인간의 적혈구는 진화를 통해 핵을 제거하고 산소 운반에 최적화된 세포로 변형되었다.

    이는 단순히 세포 하나의 변화가 아닌, 전체 순환계의 효율과 생존을 좌우하는 구조적 진화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세포 자가 유지 기능을 상실했고 지속적인 공급 시스템(골수 조혈)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처럼 적혈구는 하나의 기능에 집중함으로써 생존에 유리한 선택을 한 사례이며 이는 생물학적 최적화의 대표적인 예다.

    우리는 매일 약 2천억 개의 적혈구를 새롭게 생성하고 있다. 그중 어느 하나도 핵이 없다.

    하지만 그들은 조용히 끊임없이 우리 몸 구석구석을 순환하며 생명을 지탱하고 있다. 작고 단순해 보이는 이 무핵 세포가 인간 생리의 가장 정밀하고 전략적인 산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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